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백산에서의 봉기 ==== ||[[파일:부안 백산성.jpg|width=300]]|| || 부안 백산성 ||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에 격분한 전봉준은 이듬해인 3월초에 태인의 김개남과 무장현의 손화중과 함께 무장현(茂長)에서 4천명의 농민들과 유랑민들을 규합,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으로 집결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 권세를 가진 귀족들을 일컷는 말.]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 >동학농민군 4대 강령 서기 1894년 음력 3월 21일, 백산에 집결한 연합부대는 [[전봉준]]을 동도 대장으로 추대하고, 비서에는 송희옥과 정백현, 영솔장에는 최경선, 총참모에는 김덕명과 오시영, 그리고 총관령에는 손화중과 김개남으로 추대했다. 이들의 목적은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국 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는데 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백산은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로 넘쳐났고,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그때 생겨났다. 이들의 봉기는 조정의 탐관오리들을 비롯한 양반들과 서양의 외국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 없었다. 고부와 태인, 무장현 등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합류하자 점차 봉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이용태는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바로 도주했다. 한편, 백산 집회에 모인 10,000여명의 동학군은 영관 이경호의 주력부대가 고부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부성 북쪽에 위치한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